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마르크스/생애 (문단 편집) === 프로이센 === >'''검열의 근본적인 치료법은 검열의 폐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제도는 저열한 것이기 때문이다.'''' >----- ><최근 프로이센의 검열 제도에 대한 견해>(1842)의 결론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Rheinische-zeitung.gif|width=200]]}}}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karl-marx-friedrich-engels-en-la-imprenta-de-la-rheinische-zeitung-colonia-museo-marx-engels-moscc3ba-e29c86-e-chapiro-c2a9-c3b1c3a1ngara-marx1.jpg|width=470]]}}} || || 라인신문 (Rheinische Zeitung) || 라인신문을 발행하는 마르크스(가운데)와 엥겔스(오른쪽) || 베를린 대학 졸업 뒤 마르크스는 박사 학위를 받아 대학에서 강연을 하며 살려고 했었지만 이는 곧 좌절됐다. 당시 대학에서는 프로이센 정부의 압력으로 헤겔 좌파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베를린대는 수도에 있어 탄압의 영향이 강력했다. 그러다보니 베를린대에 남아있던 마르크스의 스승인 헤겔의 제자출신 학장 브루노 바우어 교수가 해임된다. 이때문에 마르크스는 교수가 되려했던 꿈을 접어야 했다. 사실 마르크스는 결코 얌전한 학생이 아니었고 '청년헤겔주의자당 사건'에 연루되는 등, 당대 자유주의 운동에 깊이 공감하여 매우 적극적인 정치운동을 벌인, 말하자면 당대의 '학생 [[운동권]]'에 속했으니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강사의 꿈이 좌절되자 그는 점차 정치사회적 활동에 발을 들였다. 그 시작이 프로이센의 [[검열]]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 <최근 프로이센의 검열 제도에 대한 견해>(1842)였다. 참고로 이 기사는 프로이센 검열당국의 탄압으로 1년 동안 출판되지 못하다가 1843년에야 스위스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1842년부터 마르크스는 자유주의 성향의 언론인 라인신문[* 이 신문은 1842년부터 발행되었으며 청년 헤겔파, 반정부 세력 등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를 비롯한 많은 개혁파, 이상주의자, 혁명가들이 기사를 썼다.]의 기고가로 일했다. 그는 독일의 현 정치에 대한 기사들을 썼으며 이는 큰 반향을 낳았다. 곧 그는 신문 편집장[* 실제로 신문의 편집장은 신문사 내에서 매우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다.]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라인 지방은 개발이 본격화되던 산업도시였기에 정부와 산업 부르주아지와의 충돌이 꽤 있었던 모양인데, 아마 정부를 까려고 부르주아지들이 마르크스를 신문 편집장 자리에 앉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정부 비판적 기사를 꽤나 많이 다루었다.] 편집장이 되면서 라인신문은 기고가의 범위를 늘렸으며, 라인 지역을 넘어서 프로이센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때의 프로이센은 봉건주의적 형태가 많이 남아있는 막 산업사회로 넘어가던 때였기에 봉건주의와 자유주의와의 충돌이 두드러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신문은 마르크스의 편집 아래 혁명적, 민주주의적 색채를 분명히 했으며 사회의 현실과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쏟아냈다. 마르크스는 신문에서 검열과 정부당국의 탄압을 규탄했으며, 프로이센 내의 봉건체제를 타파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사회적 약자들과 민중의 권익을 지지하는 활동도 펼쳤다. 예를 들어 여태까지 농노들에게 전통적으로[* 여기서 '전통적으로'라는 말은 중요한데, 유럽 봉건시대의 판단 기준(법)은 이전의 관례/관습에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법적 확신에 의해 지속된 [[관습법]] 수준이란 말이다.] 묵인해오던 나뭇가지 줍기(즉 장작)를 금지하는 삼림도벌법을 통과시키자, 그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외에도 부르주아지들의 우유부단함과 반동적 낭만주의에 단호히 맞서며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을 외쳤다. 이런 투쟁 속에서 라인신문은 1842년 1월 정기 구독자 400명의 작은 신문에서 1년 만에 3400여 부를 찍는 대형 신문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과 검열은 계속되었다. 일반 검열관은 물론이고 주 장관까지 검열을 시행하는 이중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신문이 제대로 발행되지 못한는 일이 빈번했다. 프로이센 당국은 라인신문을 매우 위험하게 바라봤고[* 여담으로 당시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라인신문을 '라인강의 창녀'라고 씹었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계속 저항하자 이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러던 중 라인신문이 일련의 사설에서 러시아를 신랄히 공격하는 일이 있자,[* 당시 러시아 정부는 유럽에서 19세기 내내 반계몽주의와 야만적 관습 및 탄압의 대명사였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프로이센에 비해 힘이 강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이 맹렬한 탄핵문들이 실린 신문 한 부를 우연히 보고는 깜짝 놀라 프로이센 대사에게 노여움을 표시했다. 이를 기회로 여긴 프로이센 정부는 힘이 강한 러시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1843년 4월, 결국 라인신문은 폐간되었고 마르크스는 다시 한 번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라인 신문에서 보낸 1년 동안 마르크스는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정부들에게 거침없이 비판을 하는 탁월한 정치 평론가로 변신했다. 게다가 이 시기 그의 평생 동지가 되어 줄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만났다.[* 다만 이때에는 그저 편집자와 기고자의 관계에 불과했기에 그저 스쳐지나가는 정도였다. 둘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은 마르크스가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후의 일이다.] 폐간 이후 크로이츠나흐로 향한 마르크스는 귀족 집안 출신의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하기로 했다.[* 마르크스는 본 대학에서 베를린 대학으로 옮기기 전의 기간에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이미 약혼을 맹세했었다. 둘은 어린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고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 시절 [[시]]에 관심이 있던 마르크스는 예니를 위하여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곤 하였다. 하지만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할 것을 우려한 예니는 약혼 사실을 바로 공개하지 않았고, 약혼한 지 7년이 지나서야 둘은 결혼할 수 있었다.] 예니의 집안은 극심하게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베를린대에서 교수로 재직할 정도로 출신성분도 좋고 학구적 가풍까지 여러 모로 좋은 집안의 딸이 왜 하필 사회에 불만 많은 청년과 결혼하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지적인 마르크스의 풍모에 반한 예니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43년 6월 결혼을 강행했다. 신혼 생활을 하면서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이라는 원고를 틈틈히 썼고, 헤겔의 사상에 대해 재고하며 그의 관념론적 사상을 비판하였다. 또한 이 와중에도 혁명운동을 위한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